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동아시아 근대의 형성과정에서 발현된 국민적 책임의식, 평화 사상의 전개 과정을 담고 있는 기록물로, 중요한 세계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료
전 세계 국채보상운동의 효시
일반적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들은 침략의 수단으로 약소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경제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하였고, 일제 또한 동일한 방법을 대한제국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서 한국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후 피식민지 국가에서는 외채를 갚고 경제적 주권을 회복하려는 다양한 외채상환운동이 일어났음.
다만 한국만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피지배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기층 민중이 이 운동을 주도했다는 점과 특히 여성계층의 적극적 참여가 있었으며, 일본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운동이 3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언론 캠페인을 통해 전국적 확대가 가능했다는 점 등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의 외채상환운동이 전 세계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다는 점에서 한국의 국채보상운동에 세계사적 중요성과 특이성이 있음.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
국채보상운동 정신은 20세기 말 또 다시 나라에 외환 위기가 발생했을 때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 1997년 동아시아에 외환위기가 닥치자 한국인들은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 있던 결혼반지, 돌반지와 같은 금과 은 등의 귀금속을 국가에 기부하여 부채상환의 기금을 마련.
현재 많은 이들이 금모으기 운동을 제2의 국채보상운동이라고 부른다. 구한말 한국인들이 국가의 부채를 스스로 갚고자 사재(私財)를 내놓은 방식이 새롭게 금모으기 운동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금모으기 운동이 국채보상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지적은 해외 연구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의 금모으기 운동을 목격한 캉드쉬(Michel Candessus) IMF 총재는 국채보상운동에서부터 이어진 한국 국민의 책임정신을 칭송했으며, 김용 세계은행총재는 브루킹연구소 강연에서 공동체 연대의식의 대표적 사례로 주목.
1907년 한국에서 처음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그 뒤를 이어 중국, 멕시코, 베트남 등에서 연이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것처럼 1997년 금모으기 운동 또한 전 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
국채보상운동이 한국을 넘어,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유럽 외환위기 때마다 하나의 위기극복모델로 주목받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운동의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100여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현재에도 다양한 전 세계적 외환위기 문제에 대한 극복 모델을 제시하고 각국의 외채문제 해결에 지속적으로 영감을 줄 수 있는 인류의 역사 기록물임.
최초의 언론 주도 캠페인이자 여성운동
세계경제에서 일반적 현상인 외채 발생과 외채 상환의 전형을 보여주는 한국의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35년간의 일본식민지와 3년간의 한국전쟁 속에서도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함.
특히 민간이 중심이 된 외채 상환의 기록물이란 점에서도 세계사에 유일하지만 동시에 식민지국가의 탄압 속에서도 이를 가감 없이 보도한 언론보도의 기록물로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음.
당시 언론은 각 마을에서 일어난 애틋한 사연과 감동적인 사건들을 보도함으로써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하는 동시에 본 운동이 전개되면서 발생하는 문제점까지도 가감 없이 모두 보도·논평하였기 때문에 언론 기록물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음.
이러한 국채보상운동 당시의 언론 활동은 한국 최초의 언론기관 주도형 캠페인이었으며, 특히 악성 외채를 갚기 위한 공동체적 기부운동과 저널리즘이 결합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한국 저널리즘과 미디어 역사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가 됨.
또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당시 한국 여성계층의 각성 및 사회운동 참여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료임. 국채보상기성회가 발기한 후 이튿날인 2월 23일에 대구 남일동의 부인 7인이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여성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국채보상 활동에 나서기 시작하여 이후 전국적으로 30여개에 가까운 국채보상 부녀단체들이 남성의 계도를 전혀 받지 않고 부녀자들 스스로의 의지로 조직, 활동하면서 국권 수호와 같은 절실한 민족적 과제 해결에 주권의식을 가지고 참여하여 현대적 남녀동권의식을 성장시켜나감. 그 성과 또한 남성들의 3개월 60전론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었는데, 남성들이 의연형 현금 기부가 주를 이루었던 반면 부녀들은 현금의연을 넘어 패물폐지 감선, 감반 등 다양한 방법으로 구국운동에 참여.
국채보상운동을 통한 한국 여성들의 참여는 미국 등 서구의 여성운동이 노동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는 주권운동이었다면 한국의 경우 여성들이 시민의 의무에 대한 책임의식을 표방하며 스스로 봉건적 신분의식을 탈피하고 국민계층으로 일어섰다는 점이 크게 차별됨. 이러한 점에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한국이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서구와는 다른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여성신분의 차별을 극복하면서 이른바 남녀동권의식을 가진 시민 계층이 출현한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