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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徐相燉, 1850~1913)

자와 호는 알 수 없고, 본관은 달성인데 1866년(병인 고종3년) 병인사옥(병인교란)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대박해를 받아 참살을 당하였을때 겨우 박해를 면하여 신자들의 일부는 전라도로. 또한 그 일부는 경상도로 피난하였다.

그때 서상돈은 서울에서 그의 백모의 등에 업혀 대구로 피난하여 왔다고 한다.(서석근씨 증언) 서상돈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대구지방에 첫 천주교 신부로 임명된 김보록(로벨드) 신부를 통해서 더욱 신망을 두터이 하는 한편, 그를 통해서 또한 중국 등지에서 상거래를 활발하게 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상돈에게는 병조(대륜학교 설립자), 병주, 병민의 세아들이 있었고, 대구대학교(구 한사대학) 대학원장 서정덕씨는 병주의 장남으로 그의 손자가 된다.

그는 1866년(고종3년) 병인박해 때 신앙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난 이후, 1871년부터 대구에서 지물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하였다. 1886년경에는 상당한 재벌로 부상하였으며, 이후 정부의 특경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대구교회 Robert A .J 김보록(金保輦)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발전에 힘썼으며, 시찰관에서 퇴임한 뒤에는 실업계의 중진으로 대구의 경제권을 좌우할 만큼의 갑부 반열에 들었다.

그 뒤 대구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는 한편, 성직자 돕기와 수녀보호에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주도회원으로 활약하였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광문사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구의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석람 김광제는 1866년(고종3년) 7월 1일 충청남도 보령군 웅천면 평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하고, 1888년(고종25년)에 병조 효력부위에 제수되어 통훈대부 훈련원 검정의 관직을 지냈다. 1902년(광무6년) 10월에는 정 3품 통정대부를 거쳐 호남시찰사 및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일본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905년에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왕궁마저 일본군의 수비를 맡게 되자 경무관이던 김광제는 분연히 사직하고 12월에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나 간계에 몰려 오히려 고군산도로 유배를 받게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우국충절이 밝혀져 2개월만에 특별사면 되었다.

1907년 2월 그는 대구로 내려가 광문사라는 인쇄소겸 출판사를 건립하였다. 이처럼 석람은 출판을 통하여 한국 민족에게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고 계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상이 노골화되자 1907년 서상돈(徐相燉) 등과 국채보상회(國債報償會)를 조직하였으며, 전국민이 3개월간 금연한 돈으로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일본에서 차관한 1,300만 원을 갚고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는 운동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