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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명식 상임대표의 인사말씀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3-09-01 / 조회수 : 165



(사)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명식 상임대표의 인사말씀




독자 여러분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 창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1907년 2월 21일에 대구에서 처음 시작하여 3년여 동안에 전국에서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던 국채보상운동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때는 이전의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로 넘어 오는 시기로서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청나라), 러시아, 일본이 선진 자본주의를 체택하여 자기 나라의 부를 기반으로 이웃 나라로 영토를 넓히거나 그 나라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시기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재정고문에 메카다 다네타로, 외교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스를 임명하여 고문정치를 하였으며, 1905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입국하여 을사보호조약(일명 제2차 한, 일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였으며, 고종과 일부 대신들이 반대하였으나. 박재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은 이 조약을 지지하였고, 이 조약으로 한양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외국 공관들이 철수함으로서 식민지에 한발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을사조약 체결 소식에 대신들이 자결하고 여러 지역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켜 항의하는 가운데서 일본은 1907년 한, 일신협약(정미칠조약)으로 정부의 각 부서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차관정치를 하였으며,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고,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

이 때에 재정고문으로 들어 온 메카다와 통감 이토가 협잡하여 4차에 걸쳐 고리의 차관을 도입하였는데, 그 금액이 1,300만원이 되었으므로 나라에서 이를 갚을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광문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던 서상돈이 제안하기를 성인 남자들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우면 나라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고, 이 제안에 김광제를 비롯한 참석자 전원이 찬동하여 국채보상운동이 시작 되었으며, 2월 21일에 대구 북후정에서 군민대회를 개최하여 단연회 취지서를 채택하였습니다. 이에 전국에서 군 단위 혹은 마을 단위로 의연하였고, 대구 남일동 칠부인회를 시작으로 부녀자, 기생 등 다양한 계층이서 다투어 참여 하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주권운동, 최초의 여성운동, 최초의 기부운동, 최초의 언론 켐페인으로 평가하며, 2017년 10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은 위대한 대구정신입니다.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상임대표 이 명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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