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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나라 백성이 아닌가요?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취지서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3-02-28 / 조회수 : 502





우리 부인 동포에게 공손히 알리는 글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규문(閨門)에 있으면서 삼종지의(三從之義)로서 간섭할 일이 없지만, 나라를 위한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 듣자하니 국채를 보상하려고 2천만 동포들이 석 달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은다고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흥기하도록 하고 앞길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부인들은 의논하지 않는다고 하니, 대저 여자는 나라의 백성이 아니고 군주의 교화를 받은 사람도 아닙니까? 우리들은 여자의 처지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패물뿐입니다. 태산이 작은 흙덩이를 사양치 않고 바다가 작은 물줄기를 사양치 않아서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도와서 이룹니다. 그러므로 뜻 있는 부인 동포들은 많고 적음에 구애됨이 없이 진심으로 의연금을 내어서 국채를 완전히 보상한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정미년(1907) 정월 11일 

발기인 대구 동상 남일동

정운갑의 어머니 서씨 은가락지 한 벌 두 냥쭝

서병규 아내 정씨 은장도 한 개 두 냥쭝

정운화 아내 김씨 은가락지 한 벌 한 냥 아 홉 돈쭝

서학균 아내 정씨 은가락지 한 벌 두 냥 쭝

서석균 아내 최씨 은가락지 한 벌 한 냥 오 돈쭝

서덕균 아내 이씨 은가락지 한 불 한 냥 오 돈쭝

김수원 아내 배씨 은가지 세 개 은연화 등 한 개, 두 냥 아홉 돈쭝



 여성은 나라 백성이 아닌가요?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취지서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국채보상 취지서(경고아부인동포라)」는 양력 1907년 2월 23일(음력 1907년 1월 11일) 대구 중구 남일동 지역의 여성 7인이 국채보상금 모집을 위하여 대구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고 각자 은반지와 돈을 의연하며 작성한 취지서입니다. 

  이 취지문은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에 세계열강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피식민지에 경제적 침탈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1907년 한국의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금연·금주를 통해 일제가 강제로 부여한 나라의 빚을 갚아 민족의 자립을 지향하고자 한 경제적 애국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 전개 과정에서 가장 최초로 존재가 확인되는 여성 단체의 국채보상 취지문으로, 당시 한국 여성계층의 대오각성 및 사회운동 참여 의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료라 할 수 있습니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국채보상 취지서의 내용이 새겨진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내)>



 기록물의 작성 배경과 운동의 전개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시작은 1898년 9월 1일 이소사(李召史), 김소사(金召史) 등의 서울 북촌 양반여성들이 발표한 「여권통문」(女學校設始通文)으로 봅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서로 한국여성사에 있어 그 가치가 매우 크다 할 것이나 아쉽게도 이 여학교 설시 통문을 통해 추진되던 찬양회(贊襄會)의 관립여학교 설립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신 개교한 순성학교(順成學校) 또한 1903년 폐교됨에 따라 통문의 본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권통문」을 통해 처음 드러난 한국 여성계의 근대적 권리 요구 의식은 10여년 후 발표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취지문으로 그 뜻이 이어져 기존 남성 중심으로 펼쳐지던 국채보상운동을 여성의 영역까지 넓힌 동시에 전국의 여성과 남성들을 국권 수호를 위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주체로 승격시켰다는 점에서 범국민적 남녀동권의식 발호의 신호탄이 되었다 할 만합니다.

  국채보상운동 전개 당시 처음으로 여성들의 참여가 확인되는 기록은 1907년 2월 21일 대구 서문시장 북후정에서 군민대회가 끝난 후 서문시장의 상인들이 국채보상의연금을 내놓았다는 기사입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시장에서 주로 짚신장사, 콩나물장사, 술장사, 떡장사 등을 하던 노파들이 50~60전씩 또는 1~2원씩 다투어 의연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때까지는 근대적 여성동권의식에 기초한 조직적인 단체 활동이라기보다는 단지 상인 개개인이 출연한 불특정 다수의 의연 활동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 대구 군민대회 이틀 뒤인 2월 23일에 대구 남일동의 부인 7인이 최초의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인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이 여성들은 취지서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부녀 차별적 현상을 지적하면서 “여성은 나라 백성이 아니냐. 나라사랑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국채보상운동 취지문들이 겉으로는 국민 전체가 이 운동에 참여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3개월 동안의 금연 활동만을 운동 방안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담배를 주로 소비하는 남성이 위주가 되는 남성 중심적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남일동 일곱 부인의 호소문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전국 여성들에게 널리 알려지며 국난에 마주한 여성존재에 대한 성찰과 여성의 주체 자각 의식을 각성시켰고, 남녀동권의식 및 여성의 사회진출 욕구에 불을 지폈습니다.

  근대 한국 여성의 신념을 바탕하여 자발적으로 앞장서 국채보상운동에 나선 이들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점차 알려지며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와 뜻을 같이 하는 여성 단체가 전국적으로 급속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대구 남산동에는 남산 국채보상부인회가 조직되었고 서울에서는 반찬을 절약해 국채보상금에 보태자는 감찬부인회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부산 좌천리 감선의연회, 진남포 삼화항 패물폐지부인회, 진주 애국부인회 등 총 29개의 여성단체와 17개의 준여성단체가 조직되어 여성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어나갔습니다.


<1>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여성단체*

지역

여성단체명

준 여성단체명

서울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 부인감찬회

(일진회) 국채보상여자의성회

약방기생

태의원의녀

궁내부기녀

양구의숙생도

이화학당 교사·생도

경기

인천 국미적성회(?米積成會)

김포검단(黔丹)면국채보상의무소

안성군장터동국채보상부인회

남양군부인의성회

여주흔바위예수믿는부인

충청

진천군국채보상부인회(민승면광혜원내)

음성군금자면무극리패물폐지부인회

부은군양반부인

전라

금산봉황정부인회

제주삼도리부인회

제주함덕리국채보상기성회

목포죽동수세국내부인참여

무안부내면죽동의부인참여

경상

대구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

대구국채보상탈환회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부산항좌천리감선의연부인회

단연동맹부인회(부산항상의회소내)

영도국채보상부인회(부산항)

수정동부인의연회(부산항)

진주애국부인회

애국상채회(진주)

창원항국채보상부인회

경주군국채보상부인회

거창부인의연회

금상부인의연회

의령군퇴기20명회

황해

안악군국채보상탈환회

 

평안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삼화항비석동예수교부인국채보상회

선천군부인의성회

주희(酒姬)31(평양)

평양기생 18인회

과천군동면삼성리부인 36명회

함경

청북강계부인급수보상회

영흥군국채보상감반회

 

기타

영안이씨문중부인회

종남산미타사여승

29

17

 


 기록물에 함의된 주요 의미

  이처럼 여성들이 공적인 사회 단체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것은 근대여성사에서 볼 때 매우 큰 의미를 가집니다. 역사적으로 외침 등의 국난에 처했을 때 전투를 돕기 위해 행주치마에 돌을 나르고 군사들을 위해 밥을 해 날라 주는 등 여성들의 집단적인 행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아직까진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근대 인권 의식에 기반하여 여성이 국민 된 권리와 의무를 내세우면서 독립된 참여와 활동을 주체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이 국채보상운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남성독점의 영역이었던 정치사에 여성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과 여성 스스로가 남녀동권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취지서를 통해 대오각성한 여성들은 국채보상운동에서 남성 못지않은 열성적인 참여를 했는데, 현금은 물론이고 비녀와 은반지 등 패물을 내어놓고 쌀을 줄여 의연하며, 심지어는 집을 팔아 국채보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여성 계층의 적극적인 참여는 남성들의 분발심을 일으키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으며, 기생·걸인 등의 하층민들이 국민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일치단결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데 있어 기폭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 지정이 촉발된 미국의 공식적인 최초의 여성운동이 1908년에 시작되었다는 기록과 비교해볼 때 국채보상운동을 통한 한국 여성들의 대오각성이 시기적으로 매우 앞섰음을 알 수 있는데, 미국 등 서구의 여성운동이 노동권과 참정권을 주장하는 주권운동이었다면 한국의 경우 여성들이 시민의 의무에 대한 책임의식을 표방하며 스스로 봉건적 신분의식을 탈피하고 국민계층으로 일어섰다는 점이 크게 차별되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이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취지서는 한국이 근대로의 발전과정에서 서구와는 다른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여성신분의 차별을 극복하면서 이른바 남녀동권의식을 가진 시민 계층이 출현한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습니다.


 향후 연구의 방향

  마지막으로 이 취지문에는 참여한 부인들이 그저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로만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2015년, 대구여성가족재단에서는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 이름 찾기 연구를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남일동 7부인 중 여섯 분의 이름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서병규의 처 정씨는 정경주(1866~1945), 정운갑의 모 서씨는 서채봉(1859~1936), 정운화의 처 김씨는 김달준(1877~1956), 서학균의 처 정씨는 정말경(1881~1932), 서석균(서철균)의 처 최씨는 최실경(1888~1965), 서덕균의 처 이씨는 이덕수(1889~1955)입니다. 

  또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의 결성 장소가 중구 남일동 109번지, 지금의 구 제일극장 제일빌딩 인근이라는 사실도 함께 확인하였습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의 활동과 노고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도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척되어 김수원의 처 배씨의 이름 또한 발견되기를 개인적으로 희망합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학예사/책임연구원 정우석



 * 정일선, 2017, 「대구 여성국채보상운동과 ‘남일동 7부인회’」, 『국채보상운동과 여성구국운동의 재조명』,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173~174P

 ** 박용옥, 1993, 「국채보상운동의 발단배경과 여성참여」, 『일본경제침략과 국채보상운동』, 18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