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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라!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
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2-12-16 / 조회수 : 569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라!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는 양력 1907년 1월 29일(음력 1906년 12월 16일) 대구광문사문회(大邱廣文社文會)의 특별회의에서 서상돈, 김광제 선생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처음 발의되고, 같은 해 2월 21일 대구민의소 주최로 북후정에서 첫 군민대회가 열렸을 때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담아 전 국민에게 배포한 기록물입니다.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화 정책에 맞서 조국의 경제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요원의 불길이 되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는 계기가 된 명문으로, 2017년 10월 30일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한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 문회에서 문회의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바꾸기 위한 특별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가 끝난 후 서상돈(徐相) 선생은 일본에 의해 나라의 국채가 급증해 이미 1천 3백 만 원이나 되는데 이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까지 내놓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정부에서 국채를 갚을 수 없다면 우리 2천만 동포가 직접 나서서 석 달만 담배를 끊어 그 대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자신부터 이 운동에 나서겠다며 8백 원을 선뜻 내놓았습니다.

이에 참석한 회원들 또한 만장일치로 서상돈의 의견에 찬성하였고,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선생도 그 자리에서 바로 담뱃대(煙竹)와 담배쌈지(草匣)을 없애고 석 달간의 담배 값 60전과 개인 의연금 10원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호응하여 곧 의연금이 2천여원이나 모이게 되었으며, 이후 대동광문회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로 결의, 최초 서상돈이 발의한 건의서를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로 작성하여 각 지방과 서울의 주요 언론기관에 전국적으로 배포하였습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본 기록물은 그 중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취지글 전문을 실어놓은 것으로, 광무 11년(1907년) 2월 21일자(제 444호) 『대한매일신보』의 3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잡보란 1단과 2단에 걸쳐 실은 것입니다.



기록물의 역사적 의미
이 취지서는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다양한 언론보도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취지가 전국에 널리 알려지고 경쟁적인 의연금 모금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이 취지서보다 앞선 시기의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나라 빚 갚기 운동으로 확산되는 첫 불씨를 당긴 것은 바로 이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전 세계 외채상환운동의 효시로써, 세계사적 중요성·고유성·대체 불가능성을 유네스코로부터 인정받은 국채보상운동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킨 시작점인 동시에 구한말 한국의 언론캠페인 활동을 대표하는 신문 자료라는 점에서 현존하는 수많은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중에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 격동의 제국주의 시대, 서양 열강들은 기존과는 다른 침략의 수단으로 약소국에 강제 차관을 제공한 후 고금리의 빚을 통해 안에서부터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식민지화를 추진하였고, 이러한 경제 무력화 정책에 인도, 이집트, 베트남, 폴란드 등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이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나라의 주권을 상실해야 했습니다. 일제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대한제국에 1,3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차관을 강제로 제공하였으나 한국의 국민들은 이러한 우롱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침략 정책이 노골화되던 그때, 급증하는 국채를 단순히 국가의 문제를 넘어 국민적 과제로 확연히 인식하고 취지서를 통해 2천만 국민이 담뱃값 20전을 석 달간 모아 나라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구체적 목표이자 실천방법을 제시한 것은 당대 제국주의 침탈정책의 근본을 정확히 꿰뚫어 본 선지적 혜안이었습니다. 특히 전국으로 퍼져나간 이 취지서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이유는 다른 피식민지의 국민들이 희망 없이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던 절박한 국가 위기상황을 우리는 3개월간의 국민적 단연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단연을 통한 국채상환 방법은 이 취지문을 본 누구나 손쉽게 참여할 수 있는 간편하면서도 간단한 것이어서 전 국민에게 큰 공감과 참여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취지서를 통해 당시 우리 조상들이 베트남, 폴란드, 이집트, 인도, 오키나와 등 다양한 지구촌 국가들이 이러한 외채 문제로 인해 공통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지구촌 전역의 문제를 지극히 평화적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당시 국채보상운동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 빚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고 제국주의 외채를 자발적으로 해결하려 한 평화적 운동으로, 금연·절약·나눔의 평화적 방식을 통해 갚아야할 빚이 있다면 떳떳하게 모두 갚고 앞으로는 전 세계인이 서로를 상처 입히지 않는 국가 간의 평화적인 공존을 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이 지향한 평화의 의미는 비슷한 시기 인도에서 일어난 스와데시(Swadeshi, 국산품 애용) 운동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지만 불매운동을 통한 소극적 의미의 비폭력을 넘어 각자가 모은 의연금으로 외채 그 자체를 갚아 침략 행위를 극복하고 지구촌 각국 간의 상호 호혜적 공존을 추구하는 보다 적극적인 평화를 지향하였음이 본 취지서의 전문에 자세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서」는 기록물 자체의 서지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 내용 안에 담긴 인류 공존의 평화 정신에 있어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 학예사/책임연구원 정우석